호접지몽 Remake
1. 그리하여 이야기는 시작됐다.
부스스 눈을 떴을 때만 해도, 그녀의 컨디션은 그럭저럭, 이었다. 밤새 웃고 떠들고 구른 여파인지 머리는
멍하고 몸은 욱신대고. 그 밖에, 어째 번쩍번쩍 빛나는 느낌이랄지, 언뜻 후각을 자극하는 향내랄지, 싸늘하면서도 건조한
공기랄지, 무언가 변화가 있었지만, 타고나기가 저혈압이라 아침에 약한 머리는 그 이상의 생각을 거부했다.
침대에 누운
채 눈만 깜박이다 손을 뻗어 더듬더듬 주변을 더듬었다. 그러나 힘껏 손을 내뻗어도 마땅히 잡힐 것이 잡히지 않는다. 그제야
투덜투덜 침대에서 기어나가 틀림없이 근처에서 엉망으로 굴러다닐 필수 아이템 안경을 찾아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에 집중하면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단순한 성격을 그대로 대변하듯 한참동안 바닥을 헤집던 그녀는 전방에 위치한 거대한 거울을 채 보지 못하고 정면으로 들이박았다. 소리도 경쾌하게 콩!
“…………으아. 아파. ㅠ_ㅠ;”
가볍게 울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다시 안경 찾기에 몰두하려던 찰나,
“……”
멈칫, 한 템포 숨을 멈추고, 천천히 방금 자신이 장렬하게 머리를 박은 대상을 돌아봤다.
전신이라고
부르기가 뭣하게 아예 벽 하나를 완전히 차지한, 지문 한 점 묻지 않고 반질하게 닦인 표면. 무심코 내뻗은 손가락 끝에서
싸늘하게 느껴지는 감촉은 틀림없는 유리. 무릎으로 바닥을 기던 포즈 그대로 바라보다 천천히 허리를 곧추세웠다. 갸웃― 고개를
꺾자 상대도 갸웃 고개를 꺾는다.
“거울이잖아?”
거울. 사전적 의미로, 빛의 반사를 이용하여 물체의 모양을 비추어 보는 물건.
그런데,
“저 얼굴은?”
굉장히 낯익다. 그러나 「자신」이 아니다. 갸름하니 선이 고운 흰 얼굴, 발치까지 부드럽게 물결치는 다갈색
머리카락, 둥글고 큰 눈동자와 갓 피어난 꽃잎 같은 입술. 며칠 해도 보지 못한 모양 허여멀건 안색을 제외하고 자신의 얼굴과는
전혀 다른, 흡사 그린 듯한 미녀가 다갈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서 바라보고 있었다.
뚫어져라 거울을 노려보던 다갈색 눈동자가 일순 휘둥글게 떠진다. 반평생 달고 다닌 아이템 안경이 없이도 시야가
훤하다는 사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못했다. 그 훤해진 시야에 잡힌 주변 ‒ 눈이 부시게 빛나는 대리석 기둥과 하늘하늘 높은
천장부터 몇 겹씩 늘어진 휘장, 금빛은빛 호사스런 가구와 장식 등, 아라비아 나이트 스타일의 눈이 부시도록 호화찬란한 분위기는
충분히 문제가 될지 몰라도, 당장 눈에 보이는 믿을 수 없는 상황 앞에 비교도 되지 못했다.
눈에 보이나 믿을 수
없는, 정확하게 믿기 싫은 사실에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순간, 입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치렁한 옷자락을 밟으며 중심을
잃은 그녀가 근처에 서있던 도자기 항아리 위로 넘어지고, 우당탕탕! 쨍그랑! 당연한 이치로 항아리는 요란한 소음을 남기며
산산조각 났다. 한정된 공간에서의 날카로운 울림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몇 겹의 휘장 저편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폐하!”
“어머나, 폐하!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아주 넋이 빠져 주저앉은 그녀를 누군가 부축해 일으킨다. 아마도 시녀로 추정되는 여인들이 꺅꺅 부서진 파편을
치우고 주변을 정리하며 부산을 떠는 동안, 심호흡으로 파들파들 떨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다가 문득 자신을 부축하는 ‒ 그보다는
거의 품에 끌어안다시피 한 근육질의 단단한 팔을 깨달았다. 이를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스물스물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불길함에
그녀는 작게 몸서리쳤다. ‘설마?’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설마?’ 주저주저, 삐그덕 쇳소리가 날 만큼 뻣뻣한 태도로 뒤를
돌아보자, 결국 거울에 비친 「그녀」만큼이나 낯익은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괜찮소?”
“……”
“새벽부터 갑자기……. 악몽이라도 꾼 것이오?”
“……”
“…………셰라자드?”
4, 3, 2, 1, 0.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투르曆 655년 156일, 싸늘한 공기를 데우며 사막의 태양이 떠오를 무렵, 투르 제국 수도 자비단 왕궁 술탄의 침실에서 난데없이 터져 나온 길고 긴 비명으로 이 막나가는 이야기는 시작된다.
“……”
분명 기억에는, 자신이 잠든 곳은 자기 방이었다. 해가 떠오르기 직전까지 친구와 함께 웃고 떠들고, 썩 즐겁게 놀다가 피곤에 지쳐서 잠들었다. 그런데, 막상 눈을 뜬 곳은,
사방팔방 그 어느 쪽을 봐도 끝을 알 수 없는 불모의 사막. 이아는 그 한가운데 오아시스에서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담담한 모습으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전경을 바라봤다.
‘꿈? 환상?’ 적당하게 기른 손톱으로 힘껏 반대쪽 손등을 꼬집었다. 살점이 쥐어뜯기는 아픔에 눈물까지
글썽거리더니, 이내 손톱 모양에 따라 발갛게 핏물까지 오른다. ‘꿈도 환상도 아니라면, 내가 드디어 미쳤던가.’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아니면 드디어 현실도피를 시작했던가. 그래서 미쳐서 헛것을 보고 있나. 자못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
“으음…….”
“인애?”
익숙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 차려 뒤를 돌아보자 저 건너 모래밭에 거꾸로 머리를 박고 팔다리만 바동대는 친구가
있었다. 뒷덜미를 잡고 김장철 무 뽑듯 쑥 뽑고 보니 산발로 헝클어진 머리에 모래가 덕지덕지, 가관이다. 머리며 옷이며 떡이 진
모래를 털어내는데 정신이 팔린 이아는 그 와중 낯익은 얼굴 위에 떠오른 전혀 낯선 표정을 채 잡아내지 못했다.
“엉망이네. 순 모래천지잖아.”
“……?”
“어디 좀 봐. 몸은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어?”
“……저어……?”
“잠깐, 너 안경은 어디 있는 거지? ……아, 여기 있다. 이런. 안경도 엉망이네. 그냥 대충 닦고 써.”
“저, 저기……, 여……,”
“우선, 놀라지 말고 들어봐, 인애야.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우리 지금……,”
“저기……, 시, 실례지만, 누구……시죠?”
“…………아?”
이건 또 뭐래? 친구의 입에서 튀어나온 존댓말에 이아는 당황하기 전에 황당했다.
‘내가 혹시 사람을
잘못 봤나?’ 유심하게 상대의 얼굴을 보니, 모래먼지를 뒤집어써서 엉망이지만 며칠 해도 보지 못한 모양 허여멀건 얼굴에 오밀조밀
이목구비에 맹하게 풀린 눈 위로 땡글땡글 걸친 안경에, 아무리 봐도 친구라는 이름의 웬수다. 잠시 묵묵하게 얼빠져 올려보는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대뜸 퍼억! 소리가 나도록 등짝을 갈겼다. 이어지는 몇 대의 가벼운 사랑의 구타.
“내가 누누이 말했었지. 장난도 농담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하라고. 네 눈에, 지금 이 상황이 농담 따먹기 할 상황으로 보이냐? 대체 얼마나 맞고 얼마나 굴러야 철들래? 응?”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입에서 나온 것은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반문이었다.
“저, 저는 그쪽…… 모, 모르는데……,”
“……”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그, 그보다, 여기가 대체 어디죠?”
“……”
“저, 저기……. 여보세요? 여……!!”
덥석!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주변을 두리번대는 친구 ‒ 의 껍질을 뒤집어쓴 정체불명 누군가의 멱살을 낚아챈
이아는 서로의 호흡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의 거리로 끌고 와서 강제로 시선을 맞췄다. 까만 눈동자는 처음에는 영문도 모르고
동그랗게 그 칼날 같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다가 점차로 맑은 호수 위의 파문처럼 번져가는 불안, 그리고 공포. 눈동자 가득
그렁그렁 맺히던 눈물이 마침내 또르륵 흘러내린 순간, 이아는 세상이 뒤바뀌고도 느낄 수 없었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멱살을 낚아챘을 때 모양 거칠게 상대를 내던졌다. 얼떨결에 떠밀려서 데굴데굴 굴러가는 상대를 외면한 채, 그녀는 먼 하늘 끝을 바라보며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김인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
내면에 몰아치는 모든 분노와 원망을 담아서 친구의 이름을 외쳤다.
‘밤새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고 일어나서 이제 무슨 날벼락이야.’ ‘나, 실은 술탄 아니라고 말을 해야 돼,
말아야 돼? 그보다도, 말한다고 믿어나 줄까?’ ‘믿지 않는다면, 미친년이라고 폐위 시킬 테고, 믿는다면, ……설마, 무엄하게
술탄의 육체에 들어갔다고 참수!? 말도 안 돼!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엄연히 따지면 나 역시 피해자인데!’ ‘이게
대체 꿈이야, 생시야? 천당이야, 지옥이야?’ ‘우에∼∼! 대공 전하아아아아∼∼∼∼!!!! ㅠㅁㅠ;;;;’
“…………잠깐, 대공 전하?”
역대 술탄들의 취향이 심히 의심될 정도로 크고 넓고 화려한 침대에서 커다란 쿠션을 끌어안고 상하좌우 데굴데굴 굴러가며 발악하던 인애, 벼락이라도 맞은 모양 벌떡 일어났다.
“그러니까, 지금 때가……,”
셰라자드에게 폐하라고 하니 분명 사피 알 딘 사후, 살라딘이 아직 왕궁에 있는 것을 봐서 반란 진압을 위한 지방
출장 가기 전이다. 게임 시나리오로 광휘의 후예 챕터 정도. 그 다음 챕터 사막의 광풍 초반이 반란 진압이고, 후반이 팬드래건의
자비단 공략에서 셰라자드 구출이 미션이니……,
“………………………………우훗♡”
미소였다. 꽃잎처럼 붉고 앙증맞은 입술에 떠오른 것은 분명 미소였다. 그와 함께 새하얀 얼굴에 음침한 그늘이
드리워지고, 뭉클뭉클 으스스한 음습한 기운을 퍼져나가며, 우후후후 음침한 웃음을 배경음악으로 깔리니, 결코 좋지 못한 징조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결국 제게 이런 기회를 주시는군요. TㅁT’
팬드래건 원정군이 자비단을 포위하고 왕성을 점령하면 바로 지척에서 그리 그리던 대공 전하의 실물을 볼 수 있다.
그대로 전하의 포로가 된다면 바로 눈앞에서 보는 행운도 얻을 수 있을 테고. 설령 재수 없게 살라딘에게 납치(!?)된다 치더라도
나중에 사막의 덫에서 전하께 다시 구출(!?)되니. 게다가, 그대로 일을 척척 진행시키다보면, 나중에 자기가 바리사다Ⅱ랑
포옹하겠다고 달려들지 않는 이상……, 그게 그렇게 된다.
‘내 평소 팔자 사나운 사랑으로 이리저리 굴려졌더니, 하느님이 나를 보우하사 이런 기회를 주시는구나. 만세! TㅁT)/’
이아가 들었다면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라는 구박과 함께 죽지 않을 만큼 굴려지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대공 전하였다. 마음 깊은 곳에 갈무리하고도 차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모니터 넘어 악악대며 바라만 봐야 했던 사랑. 그
사랑을 바로 지척에서 바라보고, 그것도 밀고 당기고 적당히 조정하면 공식적으로 웨딩마치까지 울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고작
친구의 구타가 무서워서 평생 가도 꿈도 꿀 수 없는 행운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기다려주시어요, 전하! 당신 뵐 날이 멀지 않았사오니!’
그렇게 홀로 어둠의 포스를 흩뿌리며 나름의 원대한 야망을 불태우려는 찰라,
“셰라자드?”
“……!?”
갑자기 행복한 소녀의 망상에 끼어드는 목소리 하나에 본능적으로 후다닥― 사정권 밖으로 도망쳤다. 막 그녀의 어깨를 짚으려던 포즈 그대로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는 살라딘의 모습에서 비로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아……, 저……,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렇다. 자신만의 원대한 야망을 계획하든 실행하든 일단 당사자를 만나고 나서 생각할 문제. 당장 현재의 그녀는 셰라자드였다. 투르의 술탄이고, 앙그라의 칼리프이며, 살라딘 님의 연인. 연인. 연인. 연인. …………털썩! OTL
“그……, 오, 오늘 아침 일은……, 정말 죄송해요. 갑자기 소란을 피워서…….”
“……”
“간밤에 제가 좋지 않은 꿈을 꿔서, 그만 실수를……. 부끄럽네요, 살라딘 님 앞에서 그런 추태를 보이다니……,”
살짝 시선을 피한 채 뭐지 모를 말을 열심히 주워 모으는데, 대꾸가 없다. ‘뭐, 뭐 잘못 말했나?’ 차마 표정으로 들어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전전긍긍하던 찰라, 나지막한 한숨이 들렸다.
“……걱정했소.”
그러면서 한 걸음 거리를 좁혀온다. ‘제발! 제발 부탁이니 끌어안지만 말아줘요! 또 끌어안으면 혀 깨물고
죽어버릴 테다!’ 차마 대놓고 내지를 수 없는 인애의 속 끓는 절규가 텔레파시로 전해졌는지, 살라딘의 접근은 그 한 걸음으로
끝났다. 대신 큰 손이 다가와 이마에 흐트러진 몇 올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인애는 필사의 노력으로 뒤로 넘어가려는 정신을
붙잡았다.
“……셰라자드.”
“아……, 예, 말씀하세요, 살라딘 님.”
“그대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되어 미안하지만……. 결국, 사피 알 딘 성하 휘하에 있던 예니체리들과 일부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소.”
충격을 받은 듯 멍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버린다. 안 그래도 가는 어깨가 떨리자 더없이 애처롭다. 지칠 대로
지친 그녀에게 좀 더 좋게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주변머리에 대리석 기둥에 머리라도 들이박고픈 자책에 시달리는 살라딘의 시야가
닿지 못하는 그곳에, 당장이라도 바가지로 쏟아질 육두문자를 되씹어 삼키는 입술과 힘껏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주먹이
있었다.
“그, 그럼…… 또 다시 출전……이시겠군요.”
“……그대를 홀로 남겨두고 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전 괜찮아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무표정에 감춰진 안타까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살라딘 님께서 그렇게 애써주시는데, 언제까지 저 혼자 쳐질 수는 없잖아요? 앞으로 더 힘든 일도 많을 텐데. 제 걱정일랑 마시고, 부디 무사히 다녀오세요.”
‘이, 이 인간이! 감히 어디 끼어들어 훼방 놓으려고! 아닌 말로, 살라딘 님이 여기 계셔봐야 뭐가 되겠어요.
천성 노가다 체질, 그냥 내려가서 저 재수 없는 화상들이나 상대하며 몸이나 푸실 것이지. 여기서 버티시면 제가 대공 전하 뵙기
뭣하지 않겠어요. 하느님의 은혜 아래 겨우 손에 넣은 전하와의 대면인데, 눈치 없는 아주버님 때문에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망칠
수는 없다고요. 부탁이니까, 걱정일랑 집어치우시고, 살라딘 님이나 긁힌 상처 없이 무사히 건강하게 돌아오세요. 저야 아무래도
좋을 일이지만, 전하께서는 또 아니시거든요.’
“셰라자드…….”
인애가 속으로 무슨 가증을 부리든 무슨 흉계를 꾸미든 살라딘은 연인의 듬직한 모습에 그저 흐뭇하다. 감동이 넘치고 말아 그만 인애가 적당히 떨어트려놓은 사정권이 무색하게 선뜻 다가서서 끌어안았다. 그 결과,
“…………끄응. (털썩!)”
“앗. 셰라자드? 셰라자드!”
가짜 술탄, 공언대로 혀 깨물고 죽지는 못했으나, 가볍게 혼절하다.
“…………그러니까…… 그것이 그렇게…… 된 거예요.”
그녀의 길다 하면 길고 짧다 하면 짧은, 상황 설명이라 하기에는 심하게 부족한 이야기가 끝나고도 이아는 한참동안 침묵했다.
“……셰라자드?”
“저……,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그러니까, 사피 알 딘 성하의 누이이며, 천민들의 살아있는 성녀이고, 투르의 술탄이자 앙그라의 칼리프인, 셰라자드?”
“…………네.”
“……”
이아는 차분하게 눈을 감고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했다.
첫째, 이유도 과정도 알 수 없는 노릇이나, 그녀는 창세기전3 ‒ 안타리아의 투르로 왔다.
둘째, 첫째보다 더욱 알 수 없는 노릇이나, 그녀의 친구 인애와 셰라자드의 육체가 뒤바뀌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라고 짐작한다.
셋째, 셰라자드의 설명으로, 투르는 사피 알 딘이 대관식 도중 철가면의 삽질로 서거하고 셰라자드가 술탄 겸 칼리프로 즉위했다.
게임으로 보면 광휘의 후예 챕터. 그런 고로, 지금쯤 못해도 알 무파사와 왈제부르가 타도 살라딘을 외치며 각자 카디스와
시지아에서 지랄발광. 더불어 바다 건너에서 매국노 3인방을 앞세운 팬드래건 특산 미친 사자가 날아오고 있다.
앞으로는 머매니안 오션이요, 뒤로는 드래곤 브래스 산맥이다.
앞뒤 없이 막막하기는 셰라자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궁의 제 처소에서 잘 자다 깨어나니 전혀 낯선 장소 전혀
낯선 육체라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진 것도 쇼크인데, 자신을 붙잡고 엉뚱한 이름을 부르던 ‒ 게다가 몇 대 패기까지 한 ‒
소녀가 곧 사막 한가운데에서 악악대며 미친 듯이 날뛰는 모습을 목도했다. 게다가 좌초지종 사정을 들은 소녀의 반응은 문 라이트의
기운만큼이나 싸늘하다. 셰라자드는 가엾게도 완전히 겁에 질렸다.
“…………하는 수 없죠.”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때까지 좌불안석 이아의 눈치만 살피던 셰라자드가 흠칫 어깨를 움츠린다.
“저어……?”
“여기 있어봐야 될 일도 없고. 우선, 자비단에 가야 할 텐데.”
“자비단……이요?”
“어디까지나 예상이지만, 아무래도 지금 셰라자드 몸에 제 친구가 들어앉은 것 같거든요. 찾아봐야 되돌릴 방법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계속 떨어져있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나저나,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야 방향을 잡을 텐데. 사막 한가운데 식량도 없고 물도 없고. 뭐 이런 암담한
경우가.’ 먼 사막을 바라보며 앞으로 행로를 고민하는 사이, 엉거주춤 따라 일어서기는 했으나 감히 말을 붙일 엄두는 내지 못하고
뒤로 물러선 셰라자드는 홀로 불안한 마음을 다독였다. 오라버니가 죽고, 갑자기 술탄이 되고, 그 때도 낯설고 불안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오라버니.’ 갑자기 떠오른 괴로운 기억에 눈물이 배어든다. 이것은 무슨 변고일까요.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아슬아슬하게 차오른 눈물이 막 흘러내리기 직전에 소맷자락으로 훔쳐냈다. 그리고 먼 사막 저편으로 던진 시선 끝,
문득 이질적인 형상 하나가 잡혔다. 희뿌옇게 일어나는 모래먼지. 이아 역시 그를 발견하고 경계의 빛을 띄웠다.
두
사람이 불안한 시선을 교환하는 동안, 모래먼지는 점차 가까워지더니 이내 한 무리의 낙타를 탄 사내들로 바로 곁에 다가와 있었다.
망토며 후드로 칭칭 감은 너저분한 몰골이며, 허리춤에 찬 시미터,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안면에 그려놓은 상처 등으로 그 정체가
능히 짐작 가능했다. 사막의 도둑이다.
“뭐야, 이것들은. 겁도 없이. 감히 누구 허락을 받고 여기 있는 거지?”
“여행자가 오아시스를 이용하는데 누구의 허락이 필요하나?”
“모르는 소리. 여기는 우리 검은 전갈의 전용 오아시스다. 우리 허락 없이 어느 누구도 여기 물을 마실 수 없어.”
“몰랐군. 내 뜻은 아니지만, 일단 사과는 하지. 그럼 우리는 갈 길이 바빠서.”
잡아채듯 셰라자드의 손목을 끌고 그 사이를 지나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콱! 시미터 한 자루가 모래밭에 박히며
길을 가로막는다. 반사적으로 셰라자드를 등 뒤로 돌리며 힐끗 곁눈질하자 낙타에서 내린 도둑들이 슬슬 두 사람을 포위하며 둘러서는
것이 보였다.
“사과한다고 했잖아? 또 무슨 볼일이야?”
“이게 어디 사과한다고 끝날 일이야? 멋대로 사용하셨으니, 사용료를 내셔야지.”
“뻔한 용건이군. 그런데 어쩌지. 우리가 지금 완전히 빈털터리라서 말이야. 오히려 이쪽이 도움을 받아야 할 형편이야.”
“그거 안타깝군. 하지만…… 사용료를 꼭 돈으로 지불하라는 법은 없지.”
도둑 중에 우두머리인가 싶은 유난히 덩치 크고 인상 사나운 작자가 나서 가늘게 뜬 눈으로 아래위 가려본다.
갸름한 얼굴선, 흔치 않은 검푸른 눈동자로 더욱 서늘한 눈매, 이지적인 이목구비, 차분하게 내려앉은 검은 머리카락, 호리하고
날렵한 몸매. 어디 가도 쉬 찾아보지 못할 미모에 히죽 음흉한 미소가 걸린다. 투실투실 살이 오른 손이 결 고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은근슬쩍 그 사이의 어깨와 목덜미를 건드렸다.
“요거, 요거, 가만 보니 제법 물건이란 말이야. 이 근방 계집은 아닌 듯 하고. 어떠냐. 너 하기 따라서 평생 호강도 가능한대. 내 집에 들어앉을 생각 없나.”
“필요 없어. 손 치워.”
“하핫! 이거 보기보다 성깔 있군. 이봐. 네가 지금 뭘 착각하는 모양인데, 여기서 내 말 한 마디면 네년도 그 뒤의 친구년도 다 끝장나는 수도 있어. 사람이 모처럼 호의를 베푸는데 고분고분……,”
두목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이지적인 미모와 달리 제법 마디가 굵고 군데군데 못이 박힌 손이 손목을 움켜쥐어
저지했다. 어리둥절해서 멍청히 선 두목을 흘겨보는 검푸른 눈동자에 싸늘한 이채가 도는 듯 하더니, 휙 젖힌 팔이 뒤로 꺾이고
옴짝달싹 못하게 짓눌려졌다. 팔꿈치가 정수리 바로 아래 급소를 정확히 강타하고, 뒤이어 흔한 말로 남자의 상징이라 불리는 부위를
있는 힘껏 걷어차며 두목은 비명은커녕 신음 한 번 내지 못하고 게거품을 문 채 자리에 엎어졌다. 축 늘어진 거구를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양 발로 멀찍이 밀쳐내며 차갑게 비웃는다.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는 거야. 더러운 놈.”
“이……, 이 년이!”
거구의 두목이 제 반도 채 안 되는 호리한 소녀에 의해 쓰러지는 광경을 입만 쩍 벌리고 지켜보던 도적떼가 일제히
시미터를 꼬나 쥐고 덤벼든다. 무식하게 온몸으로 덮쳐드는 덩치를 한 걸음 살짝 비껴 피하며 무릎으로 놈의 복부를 힘껏 가격하자
끄륵 숨넘어가는 소리를 대며 무너진다. 시미터가 아슬아슬하게 머리카락 몇 올을 자르며 스치고, 뒤이어 강력한 돌려차기로 사막
저편으로 내던진다. 허리를 굽혀 뒤에서 덮쳐드는 검을 피하면서 동시에 멱살을 잡아 모래밭에 메다꽂았다. 열사의 사막에 얼굴을
묻고도 끈질기게 꿈틀대는 놈의 목을 있는 힘껏 밟아 끝장내기가 무섭게 다음 놈이 덤벼든다. 엎어놓은 놈의 시미터를 잡아채 검을
막아낸 이아는 그대로 방향을 틀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상대의 어깻죽지를 베었다. 예리한 칼날이 살을 베고 뼈에 파고드는 순간,
검을 통해 손 안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에 이아는 저도 모르게 깊이 숨을 들이켰다. 일격에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도둑을
보는 눈동자가 단단하게 굳어졌다. 사람을 베었다. 사람을 죽였다. 살을 베고, 뼈를 깎고, 생을 단절시키고. 그 일렬의 상황이
시미터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목도와는 전혀 다른 예리하고 서늘한 감각에 난생 처음 느껴보는 살인의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치달린다. 비틀, 도망치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찰라, 문득 강한 힘이 발목을 움켜쥔다. 무방비 상태에서 중심을 잃고 쓰러진
그녀 위로 도둑떼 두목이 사납게 인상을 찌푸리며 올라앉았다.
“이…… 쥐새끼 같은 년! 귀엽다 봐주려니 앙탈을 부려!? 죽으려고 환장했나!”
“이거…… 놔, 이 개새끼야!”
각종 무술에 통한 이아나, 결국 호리한 체격의 여자였다. 있는 힘껏 발버둥치지만 온몸이 짓눌린 상황에서 거의 두
배 덩치의 거한의 힘을 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사내의 손이 옷자락을 강제로 뜯어내며 이아는 거의 이성을 잃고 죽을 작정으로
반항했다.
“아이스 미사일!”
그 때, 청 높은 주문 영창과 함께 보기에도 서늘하게 날이 선 얼음 결정들이 덮쳐들고 이아를 덮치려던 두목은
피투성이로 바닥에 뻗었다. 그러나 막상 위기를 비킨 이아는 안도보다 황당함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바람처럼 휘도는 마력,
수인을 맺은 손끝에서는 아직도 서늘한 공기가 일렁인다.
“…………셰라자드?”
“괜찮으세요?”
“나는 괜찮은데. ……방금 전의 마법, 당신이?”
“예? 아……, 예.”
“……어떻게?”
“어떻게, 라니. 저는 그저 이 분 육체에서 마나가 느껴져서 무슬림이신 줄 알고……. 아, 아닌가요?”
“…………모르겠어요.”
셰라자드는 본래 무슬림, 그것도 궁극의 경지에 이른 바라몬이다. 얼떨결에 엉뚱한 육체에 깃들어 고생 중이지만
원래 육체에서 쌓은 경험과 감각까지 날린 것은 아니었다. 위험 앞에 셰라자드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깃든 육체의 내면에 잠재된
마나를 감지했고, 그에 충실하게 마법을 썼을 뿐. 당연히 이아가 왜 저렇게 당황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법, 마법이라고?’
인애가 만화와 소설을 평균 이상으로 좋아하긴 해도, 어디까지나 평범한 20대 초반 아가씨다. 마법 따위 쓸 수
있을 리가. ‘그러고 보니,’ 손에 들린 슈미터를 바라봤다. 검도 유도 합기도 공수도 기타 등등 익혀서 주변에서 격투기 종합
세트 내지 걸어 다니는 흉기로 불리는 이아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무술가의 기본이 있다 하나 목숨 걸고 싸우는 실전에서
크게 도움 될 리는 없을 텐데. 좀 전의 그녀는 본인이 생각하도 이상할 정도로 기민하게 움직였다. ‘이 세계에 오면서 우리도
뭔가 능력이라도 생긴 건가.’ 어쩐지 찜찜한 기분에 알게 모르게 이마를 찌푸렸다.
“…………뭐, 좋아.”
연이은 쇼크에 어지럽던 정신은 금방 본디 침착함을 되찾았다. 땡볕 아래 운동으로 금방 땀에 젖은 앞머리 사이,
소녀들의 예상 외 격렬한 반항과 두목의 어이없는 죽음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우왕좌왕하는 도둑들을 쏘아보는 눈빛이 서늘하다.
“검사에 마법사. 모범적인 정석 파티군요. 아주 재미있겠어요.”
애당초 「셰라자드」는 무엇 하나 생각하고 계산하고 선택하고 행동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고요히 자리를 지켰다.
형식적인 몇 번의 조례. 정식으로 알 무파사와 왈제부르의 반란을 보고받고, 대신들의 주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살라딘을 투르
정규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술탄의 군권을 위임하며 반란군 토벌과 민심 안정을 명하는 것으로, 그녀의 역할을 끝났다.
출병을 앞둔 사열식에서 병사들을 대신해 인사하는 살라딘에게 앙그라의 이름으로 축복했다. 그 때, 자신을 올려보던 눈동자.
안타깝고 애잔하며 불안하고 걱정스런, 하여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하고 몇 번씩 돌아보던 눈동자. 그 눈빛이
어쩐지 마음 한 구석 무겁게 자리 잡았다.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야. 방해꾼도 사라졌는데, 이제 목욕재계하고 꽃단장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전하 맞이할 준비나 해야지.’ 애써 좋은 일 뒤로 묻으려 해보지만, 한 번 박힌 눈빛은 신발 속의 모래처럼 신경에
거슬린다. 혼자 끙끙대며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딴에 달리 보였는지 다과를 내오던 시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총사령관 각하께서 걱정되시나 봅니다, 폐하.”
“음? ……으음, 뭐.”
‘딱히 그 인간 걱정한 것 아닌데. 어차피 이길 것 다 알고 있고.’ 그래도 인간이라고, 양심이 장식으로나마
붙었나보다. 찔리는 마음에 대충 얼버무리며 시녀가 내온 과즙에 손을 내밀었다. 얼음과 함께 간 열대과즙은 달고도 시원하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폐하. 백전백승의 총사령관 각하가 아니십니까. 이번에도 틀림없이 승전보를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이제 열대여섯이나 됐나, 젊다기보다도 어리다는 말이 어울린다. 타인에게 봉사하는 자 특유의 조심스런 말투이나 그
목소리는 강한 확신이 담겨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에 누구보다 그의 승리를 확신하는 주제에 그만 치기처럼 되묻고 말았다.
“무섭지도 않니? 전쟁이 다시 시작됐는데.”
“물론 두렵습니다. 이곳 자비단과 먼 이야기라 하나, 전쟁은 전쟁이니까요.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칠 테죠.”
“그런데도 보기보다 편안한 얼굴이구나. 아니, 나쁘다든가 잘못했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그저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궁금해서.”
천민들의 마음의 등불, 살아있는 여신으로 불렸으며 이제는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은 이의 짓궂은 질문에 금방 얼굴을 붉히며 물러서던 시녀는, 다시 한 번 보내오는 미소에 크게 안도하며 순박한 웃음으로 답했다.
“이번 반란만 진압되면 이 땅에 진짜 평화가 올 테니까요.”
쨍강! 물이 흐르듯 이어지던 움직임이 뒤틀리는 순간, 두 손에 곱게 감싸 들린 유리잔이 순간의 틈새로 빠져나가 깨져나갔다. 산산이 흩어지는 투명한 빛의 결정. 사이사이 번지는 맑은 핏빛의 액체.
“어머나! 괜찮으십니까, 폐하!?”
“아……, 아아?”
“이런 송구할 일이. 잠시 물러나주십시오. 소인이 곧 치우겠나이다.”
“아……, 으, 으응…….”
사색이 된 얼굴, 한 톤 낮아진 목소리, 가늘게 떨리는 손끝. 평소라면 쉬 알 수 있었을 변화도, 깨진 파편을
치우는데 열중해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리에서 물러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인애는 주춤주춤 휘장을 걷어 침실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공간에서 멍청히 손을 펼쳐 바라봤다. 파편에 스쳤나, 모양 좋게 뻗은 흰 손가락에 가늘게 붉은 흠이
아릿함과 함께 남아있다. 움켜쥐고 펴고, 움켜쥐고 펴고. 생각대로 움직이는 「그녀」의 몸. 문득 목구멍까지 차오른 비명에 입을
틀어막는다. 눈동자에 물기 어린 혼란이 스며든다.
《 이번 반란만 진압되면 이 땅에 진짜 평화가 올 테니까요. 》
그 희망 앞에 인애는 입에 발린 달콤한 거짓일지언정 차마 그래, 라고 답할 수 없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텁텁한 열기에 속이 뜨겁다. 매섭게 부는 모래바람에 눈이 따갑다. 처음 눈을 떴던
오아시스에서 낙타를 타고 출발한지 꼬박 하루인데, 사막은 끝도 없이 펼쳐졌다. ‘재수 좋게(?) 도둑들을 역으로 털었기
망정이지, 걸어서 이동했으면 도중에 말라서 풍장風葬 당할 뻔 했다.’ 고스란히 전해져오던 살인의 느낌, 덮쳐누르던 사내의 무게.
꿈에서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에 등줄기가 오싹하나, 이내 도리질을 쳤다. ‘잊자. 잊지 않으면 살 수 없어.’
타박타박 앞장서다 뒤를 돌아봤다. 이미 낙타를 탄다기보다도 실린 꼴로 푹 뒤집어쓴 후드 아래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타박타박
뒤따르는 셰라자드가 있었다. 설마 벌써 말라죽은 것은 아니겠지. 슬쩍 다가가서 후드를 거둬보니, 다행히 아직은 살아있다.
“괜찮아요?”
“아……, 예. 사막에는 익숙해요.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후드 아래 새하얗게 질린 땀투성이 얼굴이나 힘겨운 미소가 체력의 한계를 웅변했다. 여기저기
아픈 곳도 많은데다 유별나게 더위에 약해 여름에는 아예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인애의 평소를 잘 아는 이아는 혹여 일사병에
쓰러지기라도 할까 여간 걱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낮게 한숨을 쉬며 살짝 물에 축인 수건으로 창백한 이마를 닦아준다.
“저……,”
“힘들면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해요. 괜히 버티다 사막에서 쓰러지지 말고. 그 몸이 얼마나 약골인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
뭔가 더 말하려다 결국 속으로 삼키고 개미 같은 목소리로 ‘고맙습니다.’라며 감사를 표하는 것을 모른 체 하며, 이아는 고삐를 흔들어 앞장섰다.
“조금만 더 힘내요. 아까 지도를 보니까 이 근처에 작은 오아시스가 하나 있던데, 오늘은 거기서 야영하죠.”
모닥불이 가물대며 잦아든다. 이아는 불씨를 들쑤시고 장작을 채웠다. 잠시 깜박이며 잦아들던 모닥불이 크게
일어나고 다시금 기세 좋게 허공에 불티를 날렸다. 이로 새벽까지 버틸 수 있을 터다. 한숨 돌려 사막의 한기도 피할 겸 졸음도
쫒을 겸 뜨겁게 우린 차를 홀짝이다 문득 얼굴이 따가워 돌아봤다. 언제 깼을까. 아니, 잠들기나 했을까. 뒤집어쓴 로브 아래
숨죽이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입에 익은 친구의 이름을 부르려다, 이내 그 눈동자에 깃든 전혀 낯선 느낌에 깨달았다.
“……셰라자드.”
시선이 마주치며 지레 놀라 로브 아래 숨어든 셰라자드는 잠시 틈을 두고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한 템포 늦은
반응이나,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모닥불에 비친 표정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잠시 망설이다 쭈뼛쭈뼛 모닥불 곁으로
다가앉았다.
“저……, 잠이 안 와서요.”
“그래도 좀 자는 편이 좋을 텐데. 자비단까지는 멀어요.”
“……”
얌전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바라보다 잠자코 양은 컵을 꺼내 방금 끓인 차를 나눠줬다. 꾸벅 감사를 표한 셰라자드는 뜨거운 차를 후후 불며 조심스럽게 들이켰다.
바람마저 잠든 사막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이아는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과 아마도 셰라자드의 육체에 있을 거라 예상되는 친구의
걱정에 머리가 썩으며 침묵했고, 첫 만남부터 호되게 당한 셰라자드는 이아의 침묵에 주눅이 들어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까만
밤하늘 가득 흩뿌려진 반짝이는 별빛, 공기 중에 아련하게 일렁이는 반딧불, 간간히 뺨을 스치는 차고 건조한 바람. 침묵이
길어지며 안절부절 못하던 셰라자드는 마침내 굳게 마음먹고 용기 있게 먼저 말을 걸었다.
“저기……, 그……, 친구 분은 어떤 분이세요?”
침묵이 무거워 먼저 말은 걸었지만 막상 자신을 향한 시선에 셰라자드는 어깨를 움츠리며 발끝만 바라봤다.
“…………그냥…… 친구예요. 아주 오래된 친구.”
그저 「친구」에 대해 말할 뿐인데, 목소리는 한결 부드럽다. 셰라자드는 마치 옛이야기라도 듣듯 조용히 그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인애랑 알고 지낸 것은, 벌써 10년이 넘었어요. 일생의 절반 이상을 그 애랑 함께 했죠. 너무 오래 함께
해서 그럴까. 호흡처럼 편안하지만, 또 없으면 불안해요. 걱정도 되고. 웃음이 많지만 눈물도 많아서 도저히 손을 놓을 수 없는
녀석이거든요. 게다가 나이에 맞지 않게 어린애 같아서, 또 무슨 말썽을 일으킬지도 모르고.”
“……”
“어이없을 만큼 단순해서 누가 도발하면 바로 넘어가고, 한 번 목표 설정하면 온천이 터지든 용암이 터지든 무조건 파대고,
사고치고 뒷수습은 나 몰라라, 혼자 삽질하고 혼자 자폭하고, 과연 상식과 개념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고, 믿을 만한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바글바글 끓는 양철 냄비, 때리면 울리는 동네북, 효율성 없는 까마귀. ……이만 일만
해도 그래. 이제 하다하다 자기 껍질까지 벗고 다니다니. 기가 차서.”
‘찾기만 해봐. 무릎 위에 엎어놓고 눈물 쏙 빠지도록 엉덩이를 때려주마.’
당사자가 들었다면 억울하다 바락바락 악을 쓸 소리를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하던 이아는, 문득 셰라자드의 모습에
보고 자기도 모르게 훗― 웃어버렸다. 어쩜 저리 똑같을까. 얼이 빠져 눈만 크게 뜨고 깜빡깜빡, 무방비한 표정. 같은 얼굴 같은
육체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익숙한 모습에 어쩐지 그녀에 대한 이성적인 거부가 한 겹 엷어진다.
“셰라자드, 방금 암담하다 생각했죠?”
“아……, 아, 아니요!”
“솔직하네, 그 반응. 하지만 괜찮아요. 사실이니까.”
“……”
“좋아하는 만큼 기대하고, 기대하는 만큼 실망하죠. 화도 내고, 짜증도 부리고, 삐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대판 싸우고서 며칠씩
연락도 끊고 지내기도 해요. 하지만 결국에 예전처럼 곁에 있는 서로가 있죠. 알고 있거든요. 그 애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릴
때는, 꼭 그만큼 나를 믿고 나를 사랑한다고. 그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
“뭐라 말로 표현 못할 만큼 암담한 녀석이지만, 그래도 같이 있으면 누구보다 편해요. 위로하고, 위로받고. 겉치레 따위 없이 마음 편히 어울리고. 그것으로 충분해요.”
그 「친구」에 대해 말하는 이아의 얼굴이 정말 부드럽고 아름다워, 셰라자드는 아마 자신의 육체 속에 있을지 모를 그녀가 부러웠다.
자연스럽고 순수한 애정. 그것은 그녀가 한 번도 넘어서지 못한 영역이었다. 원하지도 못하고, 원해서도 안됐던 마지막 경계선.
“…………부럽네요.”
“응?”
“오라버니께서는 한 번도 제게 힘들다거나 피곤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
“분명 나는 과분하게 사랑받았지만, 신뢰받은 적은 없는 거죠.”
“…………너무 소중해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은 경우도 있어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는다.
“저는 언제나 오라버니께 짐만 되었죠. 모두들 제게 그러죠. 제가 있어 오라버니께서 힘을 낼 수 있었다고, 저는 모두의 희망이라고. 살라딘 님께서 저를 위로하기 위해 애써주시지만……,”
“……”
“몇 번씩 생각했죠. 제가 아니라면, 제가 없었다면 오라버니께서 일찍이 왕궁을 떠나지 않으셔도 됐을 테고, 그럼 굳이 그 힘든
전쟁을 겪지 않아도 좀 더 원활하게 술탄의 위位에 오르실 수 있었을 거라고. 그리고…… 어쩌면, 그리 허무하게 돌아가시지도
않았을 거라고.”
“……”
“참 좋은 분이셨어요. 능력도, 마음도, 모든 면에 있어서. 제게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오라버니셨고, 왕자로서도 칼리프로서도 훌륭하게 처신하셨어요. 살아계셨더라면……, 살아만 계셨더라면 분명 훌륭한 술탄이
되셨을 거예요.”
허나, 죽었다.
정해진 과정에 따라서.
뒤이어 찾아온 침묵은 아까보다 더욱 건조하고 무거웠다. 흔한 위로의 말조차 못하고 바라보는데, 얼른 눈가에 희미하게 맺힌 물기를 닦아낸 셰라자드가 짐짓 밝게 웃음 지었다.
“죄송해요. 처음 뵙는 분께 이런 실례라니. ……사실, 이런 이야기, 사실 누구에게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네요.”
불꽃에 비쳐서인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전혀 생각지도 않던 말이 나온 것은.
“이러면서 알게 되는 거예요.”
“예?”
“이러면서 친구가 되는 거예요.”
놀란 듯 바라보는 물기 어린 눈동자에 비친 자신은, 제법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그……렇군요.”
아름다운 사람. 너무나 깨끗하고 너무나 아름다워, 그렇게 사라졌던 사람.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때가 되면 마땅히 사라질 사람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자신과 함께하고 있다. 감정을 가지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부끄러워하고 겸연쩍어한다. 살아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이아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녀 역시 행복해져야
할, 행복해도 될 이유.
마이너의 별 아래 태어났습니다.
시름시름 비담앓이
선덕여왕 온리전 참가 (...아마도?)
+ inae in Er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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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내 or 기미네